세습벌족으로 태어나 뒷짐지고 거들먹거리는 유생들이나 송곳 꽂을 땅도 없는 무지렁이들이나 죄의 규모는 차이가 있었지만 죄의 내용과 죄의 계통은 대체로 비슷해서 인간의 죄는 몇 개의 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하되 어떠한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내밀한 죄들은 다들 깊이 지니고 있을 터인데, 그 죄는 마음에 사무치고 몸에 인 박여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죄를 온전히 성찰하거나 고백할 수 없을 것임을 빌렘은 알고 있었다. p63
도주막의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밤에, 안중근은 이토의 육신에 목숨이 붙어서 작동하고 있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자신의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그렇다기 보다도, 이토가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이토의 한 생애의 자취를 모두 소급해서 무화(無化) 시키는 쪽이지 싶기도 했는데, 그 지우기가 결국 이토의 목숨을 제거하는 일이 되는 것인지는 생각하기가 머뭇거려졌다.
이토의 목숨을 제고하지 않고서, 그것이 세상을 헝클어뜨린느 작동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p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