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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속에서

가을날 창덕궁에서...

by GoodMom 2011. 9. 26.
추석이 너무 빨리 찾아와서...추석 느낌이 좀 없다싶었는데, 추석을 기점으로 날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네요.  하루 하루 가을날이 가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궁궐 중 경복궁, 경운궁, 창경궁은 자주 찾았는데...창덕궁은 그간 자율관람이 되지 않고 시간당 인원제한이 있어 미루어 오다 이번 가을  처음 찾았습니다.



▲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아침 일찍 나서 9시경 도착했는데도, 주차장은 금방 만원이 되네요. 외국인 관광객과 단체 관광객...일반관광객이 아침부터 줄을 서서 표를 끊고 입장을 했습니다. 창덕궁의 백미인 후원관람은 아직 자율관람이 허용되지 않고 1회 100명으로 인터넷 예약 50명, 현장 입장 50명 입장 인원 제한이 있어 다음에 따로 관람을 하기로 하고 오늘은 창덕궁만 관람하기로 했어요.



역대 임금들이 가장 좋아했던 궁궐로 꼽히는 창덕궁은 태종때 경복궁의 별궁으로 지은 곳입니다.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된 곳이라고 하네요. 주변 자연경관을 가능한 변형시키지 않고 그 안에 건물을 살짝 ‘얹혀 놓는’ 것처럼 지은 곳이 이 곳 창덕궁이라고 하는데, 이런 형식이 한국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1997년에 세계유산이 된 곳입니다. 한국의 궁궐 가운데 세계유산이 된 것은 창덕궁이 유일하다고 해요.


▲  삼정승 나무로 불리우는 회화나무


돈화문을 들어서니  기품있는 나무 세그루가 눈에 들어옵니다. 회화나무인 이 나무는 가지가 뻗은 모습이 선비의 기개같다 해서 삼정승 나무로 불린다고 해요.


원래 궁에 가면 산책겸 자율관람을 좋아하는데, 창덕궁은 처음이라 해설을 들으면 좋을 것 같아 알아보니 시간 별로 가이드의 설명이 있더군요. 겨레가 해설 들으면 지루하다면서 투덜거리긴 했지만, 다음부턴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자율관람을 하기로 하고 이번은 제 의견대로 해설을 듣기로 했어요. 첫 해설이 9시 반에 시작된다 해서 삼정승나무 앞에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깨끗한 한복과 부채를 들고 나타나신 해설사 선생님, 돈화문 앞에서 시작해 궐내각사-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성정각-낙선재로 이어지는 설명을 듣는데 한시간 가량이 소요된다고 말씀해 주시더군요.



▲ 궐내각사 내부에 있는 규장각


해설사 선생님을 따라 처음 간 곳은 궐내각사, 궐내각사 안에는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 내의원, 규장각, 예문관등의 중심 시설이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없어졌는데 최근에 복원이 되었다고 해요.

규장각은 왕의 시문이나 서화등을 보관 관리했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는 독립된 기구로 국립도서관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규장각 설명과 함께 강화의 외규장각과 의궤 설명을 하시면서 중앙박물관에서 전시 되었던 의궤에 대한 설명도 간단히 해주셨습니다.

의궤를 보기 전에는 규장각과 외규장각의 차이를 잘 몰랐는데...하나 하나 새롭게 배우고 살고 있네요.^^ 이렇게 궁을 둘러보고 와서 정리 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많아요.



처음에 시작할 때만 해도 해설사 선생님을 따라 도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동을 하면서 자율관람 하는 사람들이 함께 관람을 하게 되어 해설을 듣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날씨가 좀 덥긴 했지만, 선생님이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간단명료하고 핵심을 짚는 해설을 해주셔서, 좋았습니다.





허준의 동의보감을 지었다는, 약방은 새로 만들어진 건물이라 단청빛깔에서 빛이 납니다.



궐내각사를 돌아 나오는데, 겨레가 옆구리를 쿡 찌릅니다.

"엄마, 저 지붕에 까치가 먹이 물고 앉았어..."

"와, 신기하다. 사진 찍어야지..."



아침 시간인데도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궁에 갈 때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일본인 관광객을 보면 일제강점기의 아픔의 역사를 담고 있는 우리 궁에 대한 해설을 가이드들이 잘 할까 하는 궁금증이 일곤 해요.예전에 궁에서 문화해설사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을 인터뷰 한 기사를 읽으니 해설사분들은 왜곡없이 제대로 설명한다는 인터뷰를 보았는데 관광사에서 나온 가이드분들도 그 역할을 잘 할까 하는 궁금증...



▲인정전


창덕궁에서 가장 큰 건물인 인정전은 한눈에도 위풍당당한 모습...에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인정전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과 외국사진 접견, 신하들의 하례 등 국가 중요 행사가 행해진 곳이니만큼 장중하고 화려한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정전 용마루에는 이씨 왕조를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놓여있어요.



▲ 인정전 지붕위 잡상

지붕 위 잡상의 수는 그 건물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인정전 잡상은 무려 9개....마침 정문인 돈화문 앞에서 해설사 선생님을 기다리며 돈화문 위의 잡상을 겨레와 세어보고 들어왔는데(돈화문은 7개) 인정전의 잡상은 돈화문보다 더 많습니다.




▲인정전 내부

해설사선생님께서 안을 들여다 보라고 해서 다가갔더니 놀라운 광경...

천장에 전등이 설치가 되어있습니다.

임진왜란때 정궁으로 썼던 경복궁을 비롯 모든 궁궐이 소실되자 이곳 창덕궁을 재건해서 정궁으로 사용했다고 해요.  재건 후,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창덕궁은 258년간 가장 오랜 기간 임금이 거처했던 궁궐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오랜시간을 궁궐로서의 역할을 해오며 마지막까지 임금들이 거쳐했던 곳이기에 궐내 곳곳 개화기 최신의 시설로 궁궐을 보수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곳은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해 이렇게  전등을 설치했고, 또 전등 뿐이라니 커튼도 있고 창문도 창호지문이 아닌 유리로 되어있습니다.


▲선정문 앞...


선정전은 임금의 집무실로 쓰였던 곳이었는데, 순조 이후는 선정전을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으로 사용해 문에서부터 선정전까지 이어지는 곳까지 비를 막을 수 있는 지붕을 덮었다고 합니다.



▲푸른색 청기와의 선정전 지붕...

멀리서 보면 푸른 빛이 확연히 눈에 띄는 선정전 지붕은 현존하는 궁궐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지붕을 얹은 곳이라고 합니다. 지붕을 덮을 정도의 청기와를 생산하려면 비용(수입안료를 사용한다고 함)이 엄청났기 때문에  유학을 기본사상으로 삼았던 조선의 왕들은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았기에 모든 건물에 청기와를 얹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청기와 지붕은 햇빛을 받으면 더욱 찬란히 빛난다고 합니다. 창덕궁에 가시면 선정전 지붕을 꼭 유심히 살펴 보세요...


▲희정당 앞

희정당 앞은 개화기 왕실 자동차가 드나들기 쉽게 개조를 한 것이라고 합니다.  


▲희정당 내부


희정당은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했었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했다고 해요.

내부를 들여다 보니 이 곳에도 카펫에 유리창문, 그리고 샹들리에, 서양식 가구가 놓여져 있습니다. 궁하면 한복과 좌식 탁자등이 떠오르는데 창덕궁은 이전에 보았던 궁들과는 달리 조선 마지막까지 사용된 궁궐이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해설사 선생님과 이곳을 지나쳐 갈 때는 그냥 공터라고만 생각 했는데 이곳에도 각종 건물들이 있었는데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소실이 되었다고합니다. 이곳 공터 한곳에 동이가 영조를 낳았던 분만실이 있었다는 설명에 무심코 지나치던  공터를 다시 한번 보고 지나갑니다.


▲대조전 건물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된 공간입니다. 용을 상징하던 왕이 잠자리에 드는 장소였기 때문에 지붕위 용마루가 없어요.



▲순종황제비가 사용했던 침대


마지막 황후 순종황제비가 사용했던 침대는 용무늬의 조각상이 눈에 띄었어요. 매트리스가 내려앉고 부식이 상당히 진행 되었던 것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을 한것이라고 합니다.



▲ 대조전 부속 건물 흥복헌


대조전의 부속 건물로 대조전 오른편에 있는 흥복헌은 원래 왕비를 보좌하는 상궁들이 머무는 곳이었는데 1910년 순종 주재하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박제순 등이 모여 국권을 이양하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고 합니다.

어전회의실로 사용되었다는 희정당 건물을 쓰지 않고 왜 왕과 왕비의 침전 옆에 딸린 이 구석진 곳에서 국권을 이양하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져봅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은 1926년 이곳 흥복헌에서 승하했다고 합니다. 국권이양과 마지막 임금이 승하한 곳...흥복헌...



▲낙선재 건물


해설사 선생님과 둘러보는 마지막 코스, 낙선재에 이르렀습니다. 멀리에서도 궁궐의 다른 곳과 달리 아담하고 검소해 보이는 외관에 눈에 띕니다.




낙선재 들어가는 입구의 장락문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썼다고 하네요. 대원군의 꼿꼿한 기상이 글자에 잘 나타나 있는 듯 합니다.



▲ 낙선재

낙선재 건물 안에는 낙선재 외에 석복헌, 수강재가 함께 있어요.

궁궐과는 동떨어진 색다른 느낌이 들었던 낙선재 건물은 단청을 하지 않아 검소한 느낌이 들지만 세세히 들여다 보면 기둥이나 창살에 포도 무늬, 매화무늬가 그려져 있고...독특한 둥근문,  곳곳에 디자인이 숨어있는 곳입니다. 

헌종은 이곳에 낙선재를 짓고 서재겸 사랑채로 사용했고, 사랑하는 여인인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왕비의 침전과 멀리 떨어진 이 곳에 석복헌을 지었다고 해요. 조선의 궁궐 중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지은 유일한 건물이 있는 이곳 낙선재...는 '헌종의 예술과 사랑이 빚어낸 곳'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 것 같습니다.



독특한 거북등 문양의 담장...



▲ 아궁이를 가리기 위한 빙벽문양


낙선재 아래 빙벽문양을 한 이곳은, 아궁이를 가리기 위한 장소라 해요. 불과 연관 되어 화재예방의 의미도 있지만 아름다움까지 살린 디자인이라고 합니다. 낙선재는 차분하면서 검소한 아름다운 미의 조화가 굉장한 곳이었어요...



▲ 수강재


고종황제의 막내딸인 덕혜옹주가 별세했던 곳으로 기억되는 이곳 낙선재 내 수강재 ...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 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덕혜옹주의 이 말이 귓가에 맴도는 듯 합니다.

1912년 고종황제의 막내딸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1925년 강제로 일본에 끌려갔고,1931년 대마도 백작과 강제 결혼후 조국의 외면속에 잊혀지게 되면서 일본에서 정신병동 감금생활을 하다 1962년 37년만에야 귀환해 이 곳 낙선재에 머물게 됩니다.






낙선재 내 석복헌은 1966년까지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기거했고, 영친왕의 비인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한 곳이이예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의 비가 순정효황후, 고종과 귀빈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결혼한 일본 황족의 딸이 이방자 여사입니다.

낙선재는 궁에서 가장 최근까지 사람이 기거한 곳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조금 더 삶의 흔적이나 내음이 느껴졌습니다.






금천교를 돌아 나옵니다. 역사의 가장 화려했던 시간과 패망의 순간을 고스란히 지켜 본 곳...궁에 올 때면 그래서인지 돌아 나올 때 쓸쓸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오랜 시간,왕국의 전성기부터 퇴락하는 왕조의 한 맺힌 눈물을 지켜보았을 돌조각상...

역사는 흐른다...

갑자기 이 말이 떠오르네요.

가을이 가기전 창덕궁 후원을 꼭 거닐어야지...다음을 기약하고 창덕궁을 나옵니다.




창덕궁 홈페이지: http://www.cdg.go.kr/main/main.htm





2011.9

겨레는 열네살